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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금성[完]

[쿱정/다각] 새벽의 금성 56

솔찬병자 수정 2016. 11. 12. 22:33
북극의 하지의 환한 밤을 상상하자고 했다 그런 건 혼자 하라며 문을 열었다 그럼 해 넘어가는 하늘은 어떨까 물었다 서로가 닮아 있었다 드디어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했다 이제부터 입을 열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박지혜, 시작



새벽의 금성 56



"형사님!!!"

[응?]

"다짜고짜 전화해서 죄송한데...감사합니다!"

전화기 너머로 석민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낮고 나직한 울림에 순영은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이렇게 전화로 목소리를 들으니 또 다르다.

[죄송한데 감사한 게 뭐야.]

"형사님 덕분에 과제 무사히 마쳤어요!학점도 좋게 나올 것 같아요!감사해서 전화 드렸어요."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진짜 감사해요!덕분에 과제 끝냈어요.감사합니다."

[아냐,순영 학생이 과제 잘 끝냈으니까 나도 좋네.]

이제 오늘 전화의 목적이 나올 차례다.순영은 조심스럽게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떨리는 목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아 일부러 더 당돌하게.

"어...그래서 말인데요 형사님,혹시 시간 되세요?"

[나?]

"..네."

잠시 종이 넘기는 소리와 함께 침묵이 찾아왔다.석민이 말이 없자 순영은 자꾸 초조해져 왔다.언제 석민이 말을 해 올지 모르니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 침을 삼켰다.힉교에서도 이 말 하나에 안절부절 못하며 동기들을 들들 볶은 효과는 하나도 없다.

[시간이야 조금 있지.한 여섯시 정도?]

"저..저번 일도 그렇고 제가 사과드리고 싶은 일이 많아요.그래서 밥 한번 사고 싶어서.."

이상하게 자꾸 사과를 핑계로 대게 된다.더 많은 핑계가 있을 텐데.

[난 괜찮은데.]

당연히 괜찮겠지...순영은 짧은 제 생각을 탓했다.

"제가 안 괜찮아요!"

[그럼 문자할게.]

"네!!!"

미치겠다.또 죄 지은 사람처럼 이야기한 것 같다.자꾸 입에서 이런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사실 이런 핑계라도 없으면 석민은 만남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제 자신의 자기보호다.절대 거절당하고 싶지 않은.

"그래도 만나니까 뭐..."

좀 구차하고 죄 지은 것 같으면 어때.어찌되었든 석민은 나올 것이다.그것이면 충분했다.


"너 너무 그 형사한테 집착하는 거 아니야?"

"뭐가."

순영의 동기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순영을 바라보았다.눈 앞에 놓인 주황빛의 우산에 시선을 집중하며 순영은 가볍게 콧노래를 불렀다.

"아무리 셔츠에 썅토를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해도..나 같으면 부담스럽겠다."

"..그런가?"

"권순영.제발 생각 좀 하고 살아라."


그런가.확실히 부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너무 제 자신만 생각한 것이 아닌지 이제 와서 후회가 되었다.순영은 그저 석민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그와 저는 알아가는 단계지만 석민은 이미 순영에게 완벽한 남자였다.일하는 것도,저를 대하는 것도 완벽한,아무리 배워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사람.

"부담스러우려나..."

"일단 만나고 얘기해.그 사람도 즐겁게 얘기하면 된 거 아니야?"

"그런가..."

자신감이 없어진다.그렇게 연락하던 기세는 꺾인 지 오래.카페의 창 밖으로 보이는 잿빛 하늘이 꼭 제 마음 같았다.



후배들의 야유 섞인 놀림을 받으며 석민은 살짝 웃었다.전화 통화,문자 하나하나에서 속마음까지 다드러나는 순영이 신기했다.순영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순영의 반응은 솔직했다.요 며칠간 띄엄띄엄 한 문자만 봐도 반응이 재미있어 자꾸 웃음이 나왔다.

"선배."

조곤조곤한 목소리.지수다.석민은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응?"

"기분 좋아 보여요."

"아아,그래."

"부럽다."

"뭐가."

"이렇게 피곤한 일 산더미인데..선배는 그래도 작은 활력소 하나는 있네요."

확실히 재미있긴 하지.석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학생은 어떤 애에요?"

"순영 학생은 음...솔직한 애지.얼굴에 다 드러나거든.햄스터랑 얘기하는 것 같아."

"햄스터?아,약간 닮은 것 같아요."

지수가 킥킥 웃었다.이상하게 눈꼬리가 올라갔는데 자꾸 햄스터를 연상시킨다.마주보며 이야기 할 때는 눈 앞에 햄스터를 데려다 놓은 것 같았다.

"이따 만날 거야."

"부럽다..."

"너도 자주 나가잖아."

"그렇긴 해요."


고개를 두어 번 까딱인 지수는 다시 수사에 열중했다.아직 순영을 만날 때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어 석민 역시 수사에 집중했다.경찰서 안에는 조금의 소음과 함께 키보드 자판을 치는 소리가 공간을 남김없이 채웠다.



"선배,어디 가세요?"

"나 저녁약속.두시간 안에 올게."

"아니에요!오늘 다들 끝내서 밤샘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다들 끝냈다고?"

"네.오늘 알아낸 건 딱히 없어서 평소보다 수사는 널널했어요."


..그래?하며 석민은 락커룸 안으로 들어갔다.옷을 꺼내다 생각해보니 이 옷은 순영이 토를 한 바로 그 옷이었다.그 날의 순영을 떠올렸다.술에 조금 취해 있는 것 같았지만 당당하게 상대에게 큰소리치던 그 모습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남자가 남자에게 당한 성추행을 그렇게 당당히 이야기하며 자신이 매력있어 만진 것이 아니겠냐.하고 주장하는 그 모습이.보통의 남자라면 경찰서까지 오기 어려운 일일 텐데.단추를 하나하나 잠그고 머리를 정리하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을 통해 확실히 눈 안으로 들어왔다.무슨 선 보러 가는 사람도 아니고.


"오...선배 옷 갈아입으셨어."

"선배!!잘하고 오세요!!!"

"뭘 잘해."

"야아,홍 형사.그런 건 뒤에서 조용히 응원하는 거야."

"부 선배는 만날 사람도,제가 응원해 드릴 사람도 없잖아요."

"야!!!"

그만 투닥대라.하며 석민은 웃었다.어두워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문을 연 석민은 바로 뒤를 돌아 승관에게 말을 걸었다.

"승관아,우산 있어?"

"어..밖에 비와요?다들 없는 것 같은데."

아..그래.하며 석민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거센 비가 온 세상을 적시다 못해 흘러넘치게 하고 있었다.약속 장소에 비 맞은 생쥐 꼴로 나타나게 될 자신을 상상하며 비를 뚫고 뛰어가려던 그 때,빗물이 튀기는 바닥에 흰 스니커즈가 보였다.석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것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아이.주황색의 우산을 든 순영이 웃고 있었다.

"형사님."

그 때묻지 않은 순수한 눈빛을 오롯이 제게 보내며.

"우산,같이 써요."

이 비에도 떠내려가지 않은 그 강렬한 색채로 웃는다.석민은 말없이 순영이 들고 있는 우산을 부드럽게 제 손으로 옮겼다.놀라 동그랗게 떠진 아이의 눈이 가까운 거리에서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몸의 어딘가가 동요함을 느낀다.이 빗소리에 그 동요가 떠내려가길 바라며 석민은 아이가 이끄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빗소리와,저보다 두 뼘 정도 작은 순영의 키와,낭랑하게 제 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목소리와 어딘가 햄스터를 닮은 그 얼굴을 바라보지 않으려 하며 석민은 순영의 이야기에 몇 마디 맞장구를 쳐 주거나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눈은 정직하게 앞을 향하도록,그렇게 제 자신에게 이야기했다.


"형사님."

"응?"

"근데..아,아니에요."

"왜 말을 하다 말아."

"아니..좀 실례일 수도 있어서 그래요."

"뭔지 듣고 대답해 줄게."

"음...진짜 아닌데.안 들으셔도 될 것 같은데!"

"궁금한데?"


순영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석민은 잠자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기다렸다.빗소리 위로 순영의 목소리가 겹쳐 울렸다.

"아니 그냥..혹시 결혼 하셨을까 해서요."

"내가 결혼?"

유부남으로 보이니?하며 석민은 웃었다.이상하게도 이 상황이 그를 웃게 만들었다.하루종일 업무에 찌들어 살아서 그런가,하며 석민은 남은 웃음을 삼키고 말을 이어갔다.

"안타깝게도,상대가 없어서."

"아..."

"내가 결혼한 것 같아?"

"아뇨!!!"

그럼 왜 물어봤어.하며 석민은 웃었다.몇 살이나 어린 대학생이 귀여웠다.우산을 접고 순영을 가게 안으로 먼저 들여보내며 석민은 아까 삼켜낸 웃음이 입가에 다시 퍼져나감을 느꼈다.



형사님,여기에요!하며 순영이 손을 흔들었다.저만치서 석민이 단정한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언제나 생각하지만 참 빈틈이 없는 남자다.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그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순영은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뭐 드실래요?"

"난 따듯한 거 먹고 싶다."

결국 그들은 부대찌개를 주문했다.재료가 나오자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것을 조리하는 석민을 보며 순영은 또 한번 감탄했다.

"자주 오셨어요?"

"후배 중에 이걸 좋아하는 애가 있어서."

"아..그렇구나."

세심하고 가정적이다-오늘 석민의 이미지는 이렇다.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바라보며 순영은 그에 대한 생각을 이것저것 추가했다.지금껏 보지 못했던 가정적인 모습의 석민은 익숙하게 찌개를 젓고 있었다.맛있는 냄새가 가득 풍겼다.문득 그와 결혼할 여자는 참 행복한 여자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형사님."

"응?"

"되게 가정적이시네요..."

내가?하며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웃었다.처음 듣는다는 표정에 되려 어리둥절해진것은 순영이었다.

"처음인데?"

"네?이런 말이요?"

"응."

"되게 가정적이신데..섬세하시잖아요."

"하도 챙길 애들이 많아서 그래."

형 같은 이미지는 아니다.형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반듯하고 이상적이다.

"형시님은 진짜 형사님이네요."

"그게 무슨 뜻이야."

젓가락질을 히는 그 행동 하나에도 군더더기가 없다.제 앞접시에 음식은 덜어주는 그를 보며 순영은 고개를 숙였다.

"내가 한 게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아니에요!맛있는데."

"그럼 다행이다."

하고 석민이 씩 웃었다.따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부대찌개를 앞에 두고 순영은 자꾸 마음이 간지러웠다.동경하던 사람이 지금 제 앞에서 움직이고 있다.이 시간이 꿈만 같았다.새벽 내내 그를 인터뷰한 자료를 다시 정리하고 외우며 한번 더 그 완벽함에 놀라고 말았다.사진까지 흔쾌히 찍어준 그에게 뭐라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지 몰라 순영은 조용히 국자를 들어 그의 빈 그릇에 음식을 채워 주었다.석민이 고맙다고 하며 눈썹을 살짝 들며 인사해 왔다.무슨 연예인을 앞에 둔 것처럼 신기하고 이상하고 설렌다.


바쁘신 건 알지만 자꾸 연락하고 싶은 것은 욕심일까?


"순영 학생?"

"아...네."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아,잠깐 뭐 좀 생각하느라...드세요!"

"발표는 어떻게 했어?"

"떨긴 했는데 잘 마쳤어요!동기들 반응도 좋았고,전 무엇보다 형사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어요."

"쑥스럽게.넌 날 너무 띄워준다."

"아닌데..진짜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그래.하며 석민이 가볍게 웃었다.그때 그의 핸드폰이 식탁에 파동을 만들어내었다.

"잠깐만."

"네."

"네.이석민 형사입니다.어..부 형사.알았어.금방 들어갈게."

금방 들어갈게.그 말이 순영의 마음 이곳저곳을 헤집었다.아쉬웠다.더 같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아쉬운 기색을 아낌없이 내비치자 석민이 다 알겠다는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휴지를 건넸다.

"왜 이렇게 아쉬운 표정이야."

"아니에요!형사님 들어가 보셔야 하는 거 다 알아요!"

"적당히 시간 남았어.천천히 걸어가면 딱 맞겠다."

물어볼 거 있으면 다 물어봐.하며 석민이 입가를 닦았다.순영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님 그 직속 후배 분들은 어떤 분들이세요?"

"아,지수랑 승관이?"

"이름으로 부르시는구나."

"일 할 때는 부 형사,홍 형사 하는데 일 안할 때는 가볍게 이름 부르는 편이야.그게 더 친밀감 쌓기도 쉽고,애들도 더 좋아하니까."

이런 부분도 세심하다.그는 상사와 좋은 선배를 넘나들며 일하는 것 같았다.비 오는 거리를 다시 걸어가며 순영은 제 앞에 보이는 그의 우산을 쥔,남자다운 손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대부분 순영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었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즐겁게 답변해 주었다.저 멀리 경찰서의 푸른 불빛이 빗 속에서 희뿌옇게 빛났다.그곳으로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 가깝게 느껴져 아쉬웠다.석민과 조금 더 있고 싶었는데.


"그럼 오늘 고마웠.."

"이 선배!!!!!"

"어,승관아."

"뭐야.저번에 그 대학생이잖아?학생 너무 우리 선배 좋아하는 거 아니야?"

"네에?"

"우리 선배 너무 좋아하지 마~선배는 강력반 모두의 선배니까~"

시덥잖은 소리.추우니까 빨리 들어가.하면서도 좋은 선배의 미소를 잃지 않는다.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그의 손이 제 손으로 우산을 넘겨주었다.살짝 다리를 굽혀 우산 안에 들어온 그가 입을 열었다.

"계속 아쉬운 표정이네."

"아쉽죠..솔직히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요."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뱉어냈다.석민이 조금 놀란 표정을 하더니 애매한 미소를 짓는다.

"솔직한 게 장점이구나."

"네?"

"아니야."

석민의 손이 갑자기 순영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무게가 있지만 결코 무겁지만은 않은 토닥임이었다.놀란 눈으로 석민을 바라보자 그 역시 당황스러운 얼굴로 손을 내렸다.여전히 내리는 비를 작은 주황빛 우산 안에서 피하며 순영은 마지막 질문을 했다.

"형사님."

"응?"

"저,귀찮으시지 않으면 연락해도 돼요?"

석민이 웃었다.지금껏 보여주었던 형사나 선배의 웃음과는 다른 웃음을 지으며.

"마음대로 하렴."

그렇게 웃는 그는,이석민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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